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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낙인 찍기, 나락 보내기...한국 연예인 보도의 위기

by 수레바퀴 2025. 12. 7.

2026년 방영 예정인 tvN 드라마 《시그널》의 10년만의 후속작.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두번째 시그널을 예고대로 만나고 싶다. 이미지 출처: tvN

한국 연예·대중문화 보도는 어디까지를 저널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연예인의 연애, 성적 이슈, 가족 문제, 과거의 일탈을 파헤치는 보도는 독자의 피로감도 심하다. 대개 이러한 보도는 부정적인 결말-끔찍한 일로 향하기 때문이다.

즉, (단독) 폭로, 포털·유튜브·SNS에서 증폭, 2차·3차 가공 기사-누리꾼 반응, 과거 발언 재조명, 광고·방송·출연 정지, 사실상 업계 퇴출 등으로 흘러간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가 범죄자이든, 단순히 ‘도덕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든, 심지어 사실관계가 불완전하든 상관없이 ‘사회적 매장’이 이루어진다. 무혐의, 오보, 과장이 나중에 드러나더라도 피해는 거의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성을 갖는다. 

광고와 클릭에 의존하는 미디어 시장에서, 이런 ‘화살촉’은 대중의 호기심을 파고들며 영향력을 형성하고 수익으로 치환된다. 연예인의 치부를 캐는 보도는 '저널리즘'의 코스프레를 통해 연예 정보 산업으로 자리잡은지 오래다. 아예 이것만 전문으로 하는 미디어의 종횡무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연예인 보도에 필요한 윤리적 기준

저널리즘의 원칙 가운데는 비례성-'공개로 인한 피해 vs 공익의 균형' 그리고 당사자 등의 '최소 피해'가 있다. 이는 무분별한 사생활 보도에 따른 부작용을 예방하는 일종의 나침반이다. 국내외 언론단체들은 윤리강령·실천요강 등으로 앞다퉈 정리하고 있다

'최소 피해'는 먼저 당사자의 '사회적 매장'이 예측 가능한 결과라고 할 때 그 보도는 처음부터 훨씬 더 신중해야 함을 의미한다. 보도가 정당하다고 해도 불필요하게 모욕적인 표현을 줄이고, 사생활을 과잉 노출하지 않고, 범죄·비위의 정도에 비해 과도한 낙인을 찍지 않도록 조절해야 한다.

연예인·유명인은 '공인'이긴 하지만, 인권이 줄어든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어느 지점까지는 정당한 공적 검증을 밟은 뒤 그 이후는 '인간으로서 보호 받아야 할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전제이다. 또한 2차 피해자(가족, 동료, 피해자 본인 등)의 피해 최소화도 감안해야 한다. 

단, 저널리즘 윤리에서 '최소 피해' 원칙은 권력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권력자에게는 더 엄정하게, 더 깊게, 더 공격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 자체로 공공의 권한을 행사하거나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검증·비판·감시의 대상이 되는 것이 당연한 구조다. 즉, 권력자는 사생활도 공익과 충돌하는 순간 공적 검증 대상이 될 수 있다.

공익과 피해의 균형 부수는 폭로보도

비례성은 “공익의 크기와 피해의 크기를 비교해 판단하라”는 원칙인데, 권력자가 잘못한 경우는 공익의 크기가 매우 크다. 권력자 비판·폭로로 인한 이미지 타격도 민주주의 사회에서 감수해야 할 정상적 결과이다. 그래서 저널리즘은 권력자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

연예인 보도의 경우는 사회 전체의 피해를 경감하는 데 주목해야 한다. 특정 보도가 한 사람을 망가뜨리는 것을 넘어서 사회 전체의 혐오, 냉소, 불신을 키우는 한편, 다양한 공적 의제에 대한 시민의 관심을 빼앗는 부분이다. 언론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 인생 털어 먹고 사는 언론”이라는 인식을 고착시키는 것도 무시못할 '피해'다.

이런 보도는 일반적으로 분노와 욕설, 도덕적 우월감, 조리돌림 참여 욕구를 자극한다. 장기적으로는 피로감과 냉소, 신뢰 붕괴, 공적 의제의 실종으로 나타난다. 사회의 에너지가 ‘연예인 인생 털기’에 과소비 된다. 사회의 면역체계가 이런 데서 과잉 반응하다 보니, 진짜 치료해야 할 병-권력의 부패, 구조적 불평등, 정책 실패에 대한 관심과 치유의 주의력이 줄어드는 것이다. 이게 바로 ‘만성 염증’ 상태다.

배우 조진웅 보도의 경우 청소년 시절의 범죄 행위 내용과 소년원 경력의 기본값은 '보호'다. 청소년 시절의 범죄는 법·제도 차원에서도 '처벌'보다 '교정·재사회화'를 우선하는 영역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소년범 기록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봉인, 일반적인 신상공개 금지, 재사회화 기회를 보장하는 방향을 갖는다.

다시 시작할 권리를 짓밟는 언론폭력

저널리즘 윤리도 여기에 맞춰야 한다. “어릴 때 죄 지었으니 평생 따라다녀야 한다”는 관점 자체가 현대 형사정책·인권 관점과 어긋난다. 이미 법적 책임을 지고 사회에 복귀한 사람이라면, '다시 시작할 권리'와 '잊혀질 권리'를 지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배우 조진웅 보도는 저널리즘 원칙이 무너진 전형적인 케이스다. 현재의 공익과 직접 관련이 없다. 지금 그 배우가 똑같은 범죄를 반복했다거나, 약자를 상대로 또다시 가해를 했다거나, 자기 과거와 정반대되는 '도덕 교사' 역할을 하며 위선을 벌였다면 공익성 논쟁의 여지는 생긴다. 그런데 단지 "예전에 이런 짓 했던 사람인데, 지금 잘 나가고 있다” 수준이라면 공익이 아니다.

둘째, 예상 가능한 결과가 ‘사회적 매장’이다. 연예인은 이미지 산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이런 폭로는 거의 자동으로 광고·방송·캐스팅 퇴출, 사실상 업계 퇴출로 이어진다. 보도 전부터 이 결과가 충분히 예측 가능한데도 그걸 감안하지 않고 내는 건 최소 피해 원칙의 정면 위반이다.

셋째, 회복과 재사회화의 가치를 완전히 무시한다. 우리가 청소년 범죄에 '소년원–교정–재사회화' 시스템을 둔 이유 자체가 “다시는 사회에 못 나오게 하자”가 아니라 “다시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보게 하자”이기 때문이다. 그 시스템을 통과해서 잘 살려고 하는 사람을 나중에 언론이 다시 끌어내 사회적으로 ‘종신형’을 선고하는 꼴이다.

혐오와 증오, 진영의 가세...후폭풍 참담하다

그렇다면 과거는 절대 보도하면 안 되나? 예외는 있다. 예를 들어 현재 당사자가 학교폭력·성범죄 예방 홍보대사로 활동하거나 “나는 한 번도 폭력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고 주장하며 정치에 입문한다거나 하는 케이스다. 과거 가해 사실을 숨긴 채 피해자를 계속 압박하고 있는 상황도 해당한다. “그의 과거가 지금의 공적 역할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점이 공익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 경우에도 보도 방식은 피해자 보호, 맥락 설명(소년원, 이후의 삶), 현재의 태도(반성/부인/회피), 제도적 문제(소년범 기록 관리, 피해자 보호 시스템) 등 구조와 책임을 함께 다루는 방향이어야지, 마구잡이식 폭로로 이어지는 것은 완성도가 낮은 보도라고 할 것이다.

배우 조진웅은 현재 범죄나 공적 위험과 직접 연결되지 않고, 청소년 시절의 일이고, 법적 책임을 이미 졌으며, 이후 다른 잘못 없이 살아왔다. "숨겼다"는 고발성 보도는 공익은 확실치 않거나 미약한데, 개인·가족·사회적 낙인은 비가역적으로 크다. 진실 공방을 넘어 이제는 고질적인 '진영 공방'으로 소비되는 양상이다. 사회적으로 만연한 혐오와 증오의 문까지 연 셈이다. 

돌멩이 던지기를 일삼는 건 스스로 언론의 격을 낮추는 일이다. 한국의 연예 저널리즘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중요한 기능 하나는 제대로 된 비평이다. 작품성과 연기, 음악, 무대, 콘셉트, 연출, 산업적 혁신을 분석하고, 사회문화적 함의를 짚고, 소비자·팬덤이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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