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olitics

허위의 객관주의를 넘어, 정직하다면 당파적으로 말하라

by 수레바퀴 2025. 10. 28.

객관성과 중립성은 한 시대의 저널리즘을 지탱한 윤리였다. 사실 중심의 보도, 균형의 원칙, 정파로부터의 독립성은 모두 언론의 신뢰를 구축한 토대였다.

그러나 그 시대는 이미 저물고 있다. 오늘의 뉴스 생태계는 다원화된 여론과 네트워크 시민들 속에서 작동한다. 과거의 객관주의는 하나의 이상으로 남았지만, 더 이상 현실의 복잡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당파성과 성향을 드러내는 ‘해석의 저널리즘’이다.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이나 <매불쇼>가 보여준 것은 일방적인 편향이 아니다. 그들은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언어를 복원하려 한다. 팩트를 단순히 나열하기보다, 권력의 숨은 맥락을 읽고, 보도되지 않는 진실의 결을 드러내려 한다.

강형철 숙명여대 미디어학부 교수는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역사적 산물이며, 지금도 그 원칙을 회복해야 한다. 유튜브식 주창 저널리즘은 권력화되고 있으므로 객관보도의 수요가 더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2025년 10월 20일자 경향신문 오피니언면.

새로운 당파성 ― 주창의 귀환

이것이 바로 과거 정파지의 주창 저널리즘이 시민 혁명의 언어를 대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강형철 교수가 지적한 객관주의의 역사적 탄생 배경과 그 원칙의 회복을 주문한 것은 지고지순하게 옳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 객관주의가 더 이상 진실을 전달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객관주의의 ‘균형’은 종종 현실의 불균형을 가린다. ‘중립’이라는 말이 진실을 회피하는 알리바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원용진 교수가 제기한대로 오늘의 미디어 비평은 생명력을 잃었다. <뉴스공장>이나 <매불쇼>가 민주당 편을 드느냐, 정부를 비판하느냐를 따지는 논평은 이미 낡았다. 진정한 비평은 “왜 제대로 민주당 편을 들지 않느냐”가 아니라 “왜 시민의 편, 진실의 편에 서지 않느냐”를 묻는 일이다.

비평의 기준은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존재론적 성찰에 있다. 언론이 진실의 구조를 드러내지 못하면, 그 어떤 ‘공정 담론’도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한  객관주의 저널리즘이 완전히 폐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신뢰의 기반이자, 언론의 최소한의 윤리다.

객관주의와 당파성은 서로 보완적이다

그러나 그 위에 ‘당파성의 투명한 윤리’가 더해져야 한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분명히 밝히되, 타자의 사실을 왜곡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의 ‘책임 있는 당파성’이며, 새로운 저널리즘의 윤리가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튜브 저널리즘은 기성 언론의 대체물이 아니라, 공진화-상호 변형의 촉매제다. 신문과 방송은 유튜브로부터 비권위적 언어, 시민 친화적 감각을 배워야 한다. 동시에 유튜브는 객관의 규율과 검증의 윤리를 내면화해야 한다.

객관주의 저널리즘이 가능하다는 신념은 여전히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비판적 전제’로 남아야 한다.

지금의 시대는 새로운 저널리즘의 실험을 요구한다. 김어준과 매불쇼는 그 실험의 가장 도발적이고 솔직한 표현이다. 들은 기존 저널리즘이 잃어버린 ‘진실의 언어’를 다시 꺼내며, 팩트와 해석, 중립과 당파성,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흔들고 있다. 이 충돌의 지점에서 저널리즘은 다시 태어난다. 

원용진 서강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객관주의의 종언을 지지하며 당파적 저널리즘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출처: 원용진 교수의 페이스북 계정 포스트

'누가 옳은가'에서 '무엇이 옳은가'로 나아가라

객관주의를 존중하되, 그 너머의 진실을 향해 나아갈 것.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새 길이다. 언론이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단순히 ‘누가 옳은가’의 싸움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묻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객관주의가 진실의 껍질이라면, 당파성은 그 껍질을 깨는 도구다. 진실은 언제나 누군가의 관점과 용기를 통해 드러난다.

저널리즘이 스스로의 철학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그 자리를 유튜브와 알고리즘이 대신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일 수도 있다. 지금의 미디어 생태계는 ‘대립’이 아니라 ‘공진화’의 국면에 있다. 전통 언론이 비권위적 언어와 시민적 감수성을 배우고, 뉴미디어가 검증의 윤리와 사실의 엄밀함을 받아들일 때, 그 둘은 경쟁이 아니라 협력의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진실은 언제나 한쪽에 서 있다. 그러나 그것은 특정 진영의 편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자유, 공공의 이익을 지키는 편이다. 바로 그 자리에 언론이 서야 한다. 객관주의의 시대가 저물고 있는 이때 진실을 향한 새로운 윤리는 꿈틀댄다. 그 윤리의 이름이 바로 ‘책임 있는 당파성’, 그리고 '진실을 향한 용기’다.

뉴스에 대한 교양의 독자가 '~빠'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절실하게 기대하는 바는 저널리즘이 다시 시민의 손에, 그리고 진실의 중심으로 돌아오는 것일 터이다.

더보기

편집자주: 미디어 이론에서 공진화는 주로 ‘기존 매체와 새로운 매체의 관계’를 설명할 때 사용된다. 신문과 인터넷에서 보듯 서로 영향을 주며 새로운 형태의 뉴스 생태계를 형성하듯 “하나는 죽고 다른 하나가 사는” 대체 관계가 아니라, 상호 적응과 상호 변형을 통한 동반 진화(co-adaptation)를 뜻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