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는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가디언 같은 매체가 있는가?
교역 규모, 문화적 위상은 선진국 반열이지만 NYT·FT·가디언 같은 플래그십(Flagship) 뉴스조직이 없다. 대신 상업성과 진영성만 두드러진 매체들로 언론지형으로 득시글득시글하다. 세계적으로도 당당한 독보적인 언론사, 1000명 이상이 일하는 대형 뉴스조직(이 가운데 디지털(기술)인력은 보통 30%를 넘는다), 한 사회의 교양의 독자가 주목하는 뉴스 브랜드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그저 보이는 것은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기사, 비슷한 포맷의 속보 경쟁, 낡은 웹·앱 UX, 독자를 설득하지 못하는 유료화 시도, 그리고 바닥권을 맴도는 저널리즘 신뢰도다. 이것은 한국 독자에게는 불운일 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에도 해롭다.
저널리즘 가치를 고양하고, 독자와의 관계를 중심에 두며, 광고주가 아니라 독자를 ‘고객’으로 삼는 1000명 이상의 뉴스조직은 불가능한 일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지금의 경쟁환경은 최고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뉴스조직을 애초에 등장하기 어렵게 하고 있다.

첫 번째 구조: 광고주·정파 중심 시장
뉴욕타임스, 가디언, 파이낸셜타임스 같은 매체들은 각기 다른 모델을 가지지만 공통점이 있다. 핵심 매출 축에 독자 기반 수익(구독·멤버십·후원)이 실질적인 비중을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반면 한국 언론은 오랫동안 B2C(독자)가 아니라 B2B(광고주·권력)를 상대하는 산업으로 존재하고 있다. 매출의 80~90%가 대기업·공기업 광고와 협찬에서 나오는 구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
기자 수를 1000명까지 늘리기보다, 광고 영업조직과 뉴스조직 간부들이 얽히는 데 머물러 있다. “독자가 행복한가”보다 “광고주·권력과의 관계를 잘 관리하는가”가 경영 KPI가 된다. 저널리즘의 독보성 확보도 마찬가지다. 공론장에 대한 기여도, 탐사보도 역량, 데이터 저널리즘 투자 같은 항목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버틴다’ 수준으로 밀려난다.
그 결과, “독자 기반으로 스케일업하는 대형 뉴스조직”이라는 상상 자체가 시장에서 사라진다. 광고에 덜 종속되려면 일정 규모 이상의 충성 독자군이 필요하고, 그 독자를 만들려면 오랜 기간 적자를 감수하며 ‘콘텐츠와 조직’에 투자해야 하는데, 지금의 거버넌스에서는 그 인내가 발휘되기 어렵다.
두 번째 구조: 브랜드와 독자 관계가 소멸했다
NYT나 FT, 가디언은 독자가 '브랜드의 집(홈·앱)'으로 직접 들어와 콘텐츠를 소비하고, 거기서 경험을 설계하는 데 주력한다. 독자 접점이 있는 채널은 '제품'으로서 다뤄진다. 로그인, 개인화, 커뮤니티, 뉴스레터, 팟캐스트, 멤버십 혜택까지 일관된 흐름 안에 놓인다.
한국의 뉴스 소비는 정반대 방향에서 진화했다. 포털과 플랫폼이 뉴스를 ‘타일’로 잘라서 배열했고, 언론사는 타일 하나가 되었다. 헤드라인과 썸네일, 몇 줄의 리드만 노출되는 구조에서, 브랜드 개성, 톤 앤 매너, 탐사보도의 맥락은 전부 잘려 나간다.
‘이 언론사여서 본다’가 아니라, ‘실시간 이슈 목록에서 위에 떠서 본다’로 소비가 재구성됐다. 독자 데이터를 언론사가 직접 쥐지 못하기 때문에,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읽고 떠나는지에 대한 정교한 분석과 실험이 거의 축적되지 않았다.
그 결과, 뉴스조직이 투자해야 할 제품·데이터·커뮤니티 기반 전략은 애초에 뿌리 내리기 어려운 토양이 됐다. 플랫폼이라는 ‘거대한 프론트’는 있었지만, 자기 집을 짓고 가꾸는 언론사는 드물었다.
세 번째 구조: 눈앞만 챙기는 리더, 가로막힌 투자와 스케일업
NYT, FT, 가디언을 떠올리면, 공통적으로 보이는 장면이 있다. 편집권 독립·거버넌스 개편·리더십 교체를 둘러싼 치열한 내부투쟁과 사회적 논쟁이다. 신문사에서 ‘디지털 회사’로의 정체성 재정의, 조기 유료화 실패와 그 이후의 재도전, 뉴스룸 구조 개편, 데이터·제품 조직에 대한 대규모 투자 등이 하나의 타임라인에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람과 구조를 바꾸는 싸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한국의 전통 언론은 반대로 움직였다. 고전적인 광고 모델과 정치권력의 인사 개입, 가족·소수 지분 지배 구조가 결합해 “사람은 그대로 두고, 비용만 줄이는 방식”으로 위기를 버텨왔다.
공영방송 사장은 정권 교체 때마다 ‘전리품’처럼 교체되고, 상업언론은 오너와 가까운 사람, 사내 정치 승자가 윗자리를 차지한다. 디지털 전략, 독자 신뢰 회복, 탐사보도 투자 같은 의제는 리더 선발 기준에서 항상 '수사'에 불과했다.
장기적 투자로 1000명 규모 뉴스조직을 키우려면, 10년 이상 버틸 리더십과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구조에서는, 정권과 광고주만 바라보는 사람, 사고 안 치는 사람, 오너에 충성하는 사람이 먼저 뽑히고, ‘비정규직 땜빵’, 자회사 돌리기로 제한된다. R&D 지출 예산이 있기라도 한가?

네 번째 구조: ‘양산형 기사 공장’이 된 뉴스룸
큰 뉴스조직이 없다는 건 단순히 ‘사람 수가 적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을 어떻게 배치하고, 시간과 역량을 어디에 쓰느냐의 문제와도 닿아 있다. 같은 이슈에 대해 비슷한 제목, 비슷한 문장, 비슷한 인용문을 붙인 기사가 수십 건 양산된다. 탐사보도·데이터 저널리즘·비주류 이슈 발굴·지역·복잡한 정책 분석에 투입되는 인력과 시간은 항상 부족할 뿐이다.
영상·그래픽·인터랙티브, 뉴스레터·설명형 콘텐츠 같은 ‘멀티포맷 서비스’는 부가 옵션처럼 취급된다. 디지털 조직은 하위조직으로서 또는 별도의 채널을 관리하는 것으로서 작동한다. 통합적 설계와 입체적 서비스는 하세월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큰 뉴스조직이 필요한 설득력’이 생기지 않는다. “이 정도 기사와 서비스라면 왜 1000명이 필요하지?”
반대로, 정말로 ‘다른 언론사가 못하는 것’을 하겠다면 규모가 필요하다. 전국 단위의 탐사보도 네트워크, 글로벌 뉴스 커버, 데이터 팀, 비주얼·프로덕트 팀, 커뮤니티 팀, 교육·설명형 콘텐츠 팀, 로컬·국제·과학·기후·불평등·테크·문화 각 분야의 전문 데스크.... 이것이 하나의 조직으로 모여 있을 때, 비로소 “한국판 NYT, FT, 가디언”에 가까운 깊이와 폭, 독창적인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지금은 그 반대다. 각 언론사가 “100~300명짜리 비슷한 조직”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구조다. 재원은 분산되고, 인력도 분산되고, 실험도 분산된다. 인터넷신문은 더 열악하다. 뉴스 생태계 전체로 보면 비효율의 극치고, 독자 입장에서는 실망과 회피의 감정만 증가한다. 생명 연장을 위해 권력과 광고주에 매달리면서 '저널리즘' 타령이다.
기만적인 객관주의가 저널리즘 신뢰에 남긴 상처
‘한국판 NYT’의 부재는 단순히 자존심 문제도, 콘텐츠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 인프라의 결손이다. 글로벌 금융·기후·안보·기술 의제를 한국어로 깊이 있게 해석·검증해 주는 조직이 부족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도 아니다.
거대 권력(국가·재벌·검찰·정보기관)을 장기 추적·감시할 수 있는 지속형 탐사조직도 얇다. 법조 취재는 검찰발 소스만 난무한다. 지역·노동·성소수자·소수자 이슈를 꾸준히 파고드는 전문팀은 언제나 취약하다. 12·3 비상계엄 이후 한국언론의 진영주의는 민주주의를 부식시키고 있다.
이러는 사이 영어권 매체 등 1차 정보출처를 찾아가거나 아예 정파적 유튜브·커뮤니티의 해석에 휩쓸리는 독자들만 늘었다. 뉴스 회피형 독자도 증가일로다. 정확히는 똑똑한 뉴스 소비도 부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저널리즘의 부패에서 확대된다. 저널리즘 인프라의 한 축을 담당해야 할 품질 최우선주의, 교양의 독자를 좇는 '최고 최대 최상의 뉴스조직’이 드물수록, '집단적 사고 위험'도 늘어난다.
집중과 선택: ‘국가적 플래그십’을 키우는 발상
품격과 신뢰의 언론은 이 땅에 불가능한가? 불가능하지 않다. 다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전제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인식의 대전환이 절실하다.
가장 최우선적으로는 리더의 교체다. 광고주·정권 관리형 리더가 아니라, 독자·데이터·제품·저널리즘 가치를 동시에 이해하는 리더가 전면에 서야 한다. 거버넌스 개편도 실질화가 필요하다. 다양한 기금의 형태로 공영방송은 물론 민영 언론 모두에게 공적 자원이 들어가고 있다. 리더 인선, 거버넌스에 대한 시민·독자·전문가의 감시와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장기 디지털 전략과 저널리즘 투자 계획으로 한국판 세계언론을 표방하는 좌표와 비전이 나와야 한다. 50만명의 교양의 독자가 월 2만원씩-스타벅스 아메리카노 4잔 값만 후원한다면 한국 최대, 최고, 최상의 뉴스조직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언론정책의 재설계도 필요하다. 정부 광고·공적 기금 등 지원의 배분 기준을 나눠주기식 할당이 아니라 신뢰도·정정보도·팩트체크·다양성·독자 참여도 같은 지표와 연동해야 한다. 불분명하고 불확실한 근거는 언론지원의 정당성을 점점 퇴색하게 만들 뿐이다.

'한국판 NYT' 뉴스조직을 상정하고 저널리즘을 고양하자
캐나다, 유럽 등도 '저널리즘 기능을 수행하는 매체' '공공목적'이 뚜렷한 언론만 대상으로 정부의 공적지원이 이뤄지는 건 상식에 가깝다. '정파적 언론', '클릭 장사' 본위의 매체에는 공적자원이 줄어들고, “독자와 신뢰를 축적하는 매체”에게 자원이 모이게 하는 것은 국가의 국민혈세 운용에서 너무도 당연한 원칙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에 NYT, FT, WP, 가디언, CNN급의 플래그십 뉴스조직이 없는 것은 “한국인이 저널리즘을 싫어해서도, 기자들이 능력이 부족해서도”가 아니다. 광고·협찬 중심의 수익 구조, 포털 종속적 유통, 오너·정치권력이 결박한 거버넌스, 폐쇄적인 인사 시스템과 리더십, 독자 기반 비즈니스에 대한 사회적 상상력의 부재 등 이 다섯 가지가 겹쳐 만들어낸 구조적 결과다.
따라서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왜 한국에는 NYT 같은 언론사가 없나?”가 아니라 “왜 그런 언론이 등장하지 못하도록 시장과 제도를 설계해 왔는가”다. 그리고 다음 질문이 뒤따라야 한다. “지금이라도, 리더를 바꾸고, 거버넌스를 고치고, 독자 기반으로 스케일업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만들 수 있는가?”
1000명 이상의 뉴스조직, 저널리즘 가치를 고양하고, 독자와의 관계를 중심에 두며, 광고주가 아닌 독자를 핵심 고객으로 삼는 언론사. 그것은 한국 사회에 과분한 이상향이 아니다. 우리가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때만 열리는, 충분히 현실적인 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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