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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_journalism

'멍청한' 신문과 '영리한' 독자

by 수레바퀴 2006. 8. 3.
 

굴뚝산업 시대를 대변하는 신문은 산업 패러다임이 IT로 급변하면서 두 자릿수 성장을 완전히 멈췄다. 스포츠신문이긴 하지만 대도시에서 발행되는 신문이 마이너스 성장을 견디지 못하고 윤전기가 멈추는 유례없는 일까지 겪어야 했다. 신문산업 전반에 구조조정이 되풀이 됐고, 임금은 쪼그라들었다.

신문산업이 재편되는 진통이라고 하기엔 참담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다. 비관적인 신문시장의 현실은 통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국내 경제활동인구 2300만명. 2005년 11월말 현재 총가구수는 1600만. 이중 신문구독가구는 긍정적으로 잡아도 50%가 되지 않는 데다가 서서히 줄어드는 추세다.

여기에 종합일간지 3개사의 시장 점유율이 과반을 넘겨 최대 70%를 훌쩍 넘기고 있다. 신문기업간 빈익빈부익부가 고착화하면서 뉴미디어 시장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A신문은 수십억대의 TV스튜디오를 구축했지만, B신문은 지난 3년간 인터넷을 포함 뉴미디어 분야에 0원이 투자됐다.

C와 D신문은 통합뉴스룸을 구축했지만 뒷받침되는 투자재원이 없는 데다가 효과적인 전략이 부재, 핵심 인력들만 떠나 보내야 했다. E신문은 수년간 홈페이지 개편도 하지 못했다. F와 G, H 신문 등은 이렇다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지 못한 채 사진, 기사 등이 아날로그로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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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신문산업 전반이 활력을 잃는 것은 조직내부의 노령화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기자협회보는 편집국내 차장급 이상 간부가 차지하는 비율이 50%를 넘으면서 ‘역피라미드형’ 구조가 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검증되지 않고 딱딱한 조직의 노령화는 천편일률적인 콘텐츠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행된다.

지난 2주간 만난 몇개 신문사의 경영기획실 관계자들은 미래에 대해 낙관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첫째, 영화와 TV의 관계처럼 뉴미디어를 보완하는 신문의 역할이 분명히 있고 둘째, 신문산업을 민주주의라는 큰 틀에서 보호해야 한다는 당위(?)였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 준비하는 것은 진부했다.

신문사 간부들의 낙천적인 관점은 ‘콘텐츠’라는 주제에서도 드러났다. A신문의 한 관계자는 “독자들을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우리가 생산하는 콘텐츠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콘텐츠와 독자가 과연 유의미한 것인지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신문산업의 지난 시절은 정보와 유통의 독점시대였다. 발행부수와 유가부수를 적당히 포장하면 됐다. 그러나 이제는 신문발행을 늘린다고 광고주들이 동감하는 시대는 아니다. 모든 것이 계량화하고 투명해지는 디지털 경제에서는 얼마나 수준 높은 시장을 갖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은 콘텐츠라는 ‘끈’에서 확보된다. 따라서 콘텐츠에 대한 남다른 기획과 투자는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지점이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콘텐츠 품질이 판매 부수의 많고 적음으로 직결되지 않았지만, 인터넷을 포함 다양한 플랫폼들은 이용자들에 의해 선택될 때만 유효하게 대접받고 있다.

CBS의 노컷뉴스, 머니투데이의 스타뉴스,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이 현재까지 선전할 수 있었던 것도 다른 관점의 창조에 의해서 콘텐츠를 생산, 유통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문기업들은 아직도 낡은 환경에 안주하고 있다. 일반적인 신문기자들은 여전히 신문기사로 모든 업무를 마치고 있다.

신문 편집국은 정치-경제-사회-스포츠라는 부서와 출입처에 의존하고 있다. 수직적인 위계질서는 창의와 도전을 단념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독자와 소통하지 않는 기자들이 폭우가 쏟아지는 상황에서도 정치인들과는 골프를 치러 다니고 있다. 권력을 흠집내는 것이 독보적인 콘텐츠라고 착각하는 오만함도 그치지 않고 있다.

미디어 패러다임이 근본부터 바뀌고 있는 데도 기자와 콘텐츠는 진화하지 못하는 것은 신문의 한계다. 신문 그 이상의 신문을 원하는 현대 지식대중의 눈높이는 방대한 지식커뮤니티를 연출하는 데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스로 콘텐츠를 만들어 유통시키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에서 신문과 신문의 콘텐츠는 더 이상 새롭고 특별한 것이 아니다. 지천으로 널린 그저 그런 콘텐츠일 뿐이다. 날마다 ‘색깔론’을 들이대는 A신문은 아무리 객관적이라고 우겨도 이미 그 신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 잘 알고(Know) 있다.

영리한 독자들은 신문 브랜드에 대해서 아예 낙인을 찍으며 동조의 세력을 넓히고있다. 블로그 커뮤니티에 가보면 한국의 권위지라고 알려진 신문들은 액티브 유저(Active User)들에 의해 난도질 당하고 있다. 지식대중에게 더 이상 어떤 신문은 선호되지 않는다.

신문이 ‘가’라고 쓰면 독자들은 막연히 받아들이지 않고 수십 갈래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한번 신문과 콘텐츠를 부정(不正)한다. 그런데도 신문은 똑같은 태도와 관점으로 지면과 인터넷을 낭비한다.

다매체 다채널. 공간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다양성의 요구는 증대하는데 똑같은 콘텐츠들이 넘실댄다. 가령 웰빙 섹션을 만들면 모든 신문이 잘 먹고 잘 노는 것에 집중한다. 자동차 섹션이 붐을 타면 너도나도 자동차 이야기를 한다. 연예인 누드 사진조차 다른 것이 없는 똑같은 것의 재배포다.

이러한 신문 콘텐츠의 한계는 신문을 만드는 저널리스트의 창조력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신문이 브랜드의 관행과 관점, 관성을 벗어나지 않는한 뉴미디어는 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영리한 독자들은 서서히 신문과의 관계를 스스로 결정하고 있다.

반대로 신문은 더 멍청해지면서 마치 투견장에서 얻은 경험을 되풀이해 잃어버린 권력과 권위를 찾으려 안달이다. 그러나 그것은 콘텐츠를 모독하는 일이고, 브랜드를 파탄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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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미디어의 콘텐츠는 얼마나 다양한 통로를 열어 두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결정된다. 경쟁매체의 기사도 링크하고, 다른 시각도 공정히 다루는 일 따위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완전히 새로운 브랜드 전략이 요구된다. 여기에는 뉴스조직, 콘텐츠, 독자에 대한 전략의 재조정이 수반된다.

한국시장에서 대단히 영리해진 독자들을 이끄는 일은 어렵다. 그러나 한번 연결된 영리한 독자는 브랜드의 전령이 된다. 오마이뉴스처럼, BBC처럼, 변모하고 창조적이며 수평적인 브랜드는 시장의 든든한 백그라운드다.

혁신과 자기희생의 길로 가는 신문기업의 오너십만이 굴뚝산업과 냉전시대의 향수와 권위를 좇는 멍청한 신문을 막고, 영리한 독자와 악수하는 길을 연다.

덧글. 기자협회보 인터넷판 200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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