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

여성의 나체 위에 회를 얹어 먹는 알몸 초밥(naked susi) 시식 장면이 지난달 한 케이블TV를 통해 방송된 뒤 부정적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 성의 상품화를 부추겨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한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제작진은 재방송 영상은 모자이크 처리하고 인터넷 다시보기는 아예 등록하지 않기로 하는 등 신속한 사과조치를 취하며 사태진화에 나섰다.

그런데 이같은 선정성 논란은 어제 오늘의 문제도 아니고 케이블 TV만의 문제도 아니다. 다매체 다채널에서 쏟아져 나오는 선정적 프로그램들은 시청률이 오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방송시장의 현실을 웅변한다. 보통 백여개에 가까운 TV 채널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시청자들에게 선택받으려면 평범한 프로그램으로는 안되기 때문이다.

최근 1~2년 사이 직접 콘텐츠를 제작해온 케이블 방송 사업자는 경쟁적으로 속살이 드러나는 야한 장면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미는 것이 보편적인 흐름이 됐다. 지상파 방송도 스타급 연예인을 내세운 키쓰신과 베드신을 시청률 반전의 소재로 삼아왔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여기에 신문사들이 운영하는 웹 사이트는 이용자들의 시선을 끄는 섹슈얼 이미지들을 초기화면에 내걸면서 트래픽 장사에 나선지 오래다.

UCC를 앞장 세우며 웹2.0 시대를 주도한다는 언론사도, 재도약을 선언하거나 이젠 더 넓은 상대인 오디언스를 상대하겠다는 매체도 야한 문구와 사진을 걸어 놓고 아랫도리 이야기를 좌판처럼 펼쳐 놓고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신문이 방송사의 선정적 프로그램은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그런 프로그램에 대한 기사를 남발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채홍사'로 전락하고 있다.

노골적인 성 상품화 프로그램과 기사가 얽히고 섥히는 근본적인 원인을 탐조하고 대안을 만드는 미디어는 온데간데 없다. 속살 사진을 삽입해 눈과 손만 붙드려는 기회주의적인 콘텐츠만 득시글거린다. 불과 1년 전에 클릭을 노린 마구잡이식 기사 어뷰징(abusing:조작)으로 포털사이트로부터 경고까지 들은 언론사들이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저널리즘의 신뢰도, 브랜드를 강조하는 해외 유력 매체들의 웹 사이트는 커뮤니티 운영에서부터 격이 다르다. 우수한 콘텐츠를 통해 로열티가 높은 오디언스가 규합돼 결국 생존의 동력이 된다는 원칙을 되뇌인다. 선정적인 뉴스는 또다른 대중지들의 영역이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잡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국내 언론에서는 왜 이런 노골적인 성 장사가 계속 연출되는 것일까? 언론사가 독자와 시청자, 더 나아가 오디언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고민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상당수의 뉴스 소비자들이 인터넷에서 뉴스를 이용하고 있음에도 아직 대부분의 언론사는 주요 역량을 신문지면과 방송에 투입하고 있다. 또 유비쿼터스 인프라로 언제 어디서나 뉴스를 볼 수 있는 지평이 열렸지만, 각각의 디바이스에서 최적화된 서비스를 위한 투자는 지체되고 있다. 올드미디어의 비전을 의문하는 기자들이 이직 행렬에 동승하고 있다.

결국 네이키드 스시는 선정적 콘텐츠를 중심으로 클릭과 시청률을 기대하는 올드 미디어와 기자의 부끄러운 몸뚱이 위에 놓인 쓸모 없는 가리개나 다름없다. 더구나 옐로우 저널리즘은 비단 콘텐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자본의 영역에서도 확장되고 있어서이다. 네이키드 스시 류의 프로그램, 성을 상품화한 뉴스의 쓰나미를 그럴 수 있는 일이려니 하고 넘길 수 없는 상황이다.

거대하게 상업화하는 시장 환경이 콘텐츠의 깊이와 질이 바탕이 되는 저널리즘의 미래를 어둡게 몰아 간다. 관성화된 올드 미디어 내부의 콘텐츠 생산 과정이 M&A 등 산업적 논리가 지배하는 시장에 빠져들수록 저널리스트가 맞게 될 불행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빠른 시간 내에 성찰에 기초한 혁신을 진행하지 않으면 저널리즘의 가치가 상업화된 빅 브라더스에게 힘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다. 이는 지금까지 지켜온 저널리즘의 사회적 권위와 명분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2012년은 아날로그TV가 종언을 고하고 전국이 광대역통신망으로 네트워크의 고도화가 이뤄진다. 저널리즘의 미래를 생각할 시간이 별로 남지 않았기에 미디어 종사자들의 공공 저널리즘을 향한 분투가 그 어느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출처 : 기자협회보 2008. 4.2. <언론다시보기>

'자유게시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문방송 겸영 앞서 양극화 풀어야  (2) 2008.04.23
네이키드 스시  (6) 2008.04.02
신문 광고 변신 눈부시다  (2) 2008.02.12
<뉴스의 혁명, NewsML> 출간  (8) 2008.01.09
  1. freeism 2008.04.02 18:08

    저도 이 방송을 제가 종종가는 커뮤니티에 누군가 올려주셔서 보게 되었는데요...
    한 5분 봤나... 좀 어이가 없어서 더 보기가 싫더군요.

    저도 대한민국의 건강한 한 남성으로서 性에 관심이 많지만, 이런 식의 방송은 상당히 불쾌감만을 조성하게 되더군요(원래 이 방송채널이 좀 그렇기로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

    아무튼 자극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활용하는 것에는 개인적으로 별 불만없지만, 앞뒤없는 저런(저라도 기획 할 수 있을 것 같은) 프로그램은 좀 참아줬으면 좋겠네요.
    (물론 기획한 PD는 전혀 죄가 없을 지 모르지만요;;; )

    • 수레바퀴 2008.04.02 21:19

      예, 어쩌면 방송 제작자는 산업의 논리 즉, 상업화라는 흐름을 거역할 수 없을지 모릅니다. 시청자를 비롯 미디어 소비자들이 이러한 흐름을 돌려놓을 수 있도록 각성한 저널리스트 그룹과 연대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2. 이승훈 2008.04.14 13:38

    개인적 생각입니다만 저는 방송이 출판처럼 되어야한다고 봅니다. 방송 자원을 일부로 한정하고 그것을 언론기득권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은 기득권자들의 논리라고 봅니다. 출판물에서 인체스시에 관한 책을 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처럼 방송에서도 인체 스시에 관한 방송을 내도 뭐라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방송자원을 언론기득권에게 한정시키니까 인체스시방송이 문제가 되는 것일 뿐. 방송자원을 만인에게 풀어버리면 그 인체스시방송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 수레바퀴 2008.04.14 13:52

      일부 동의하는 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출판물과 달리 파급력이 큰 방송 프로그램이 미치는 결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 수 있습니다. 단지 기득권의 논리라고 보기에는 방송이 갖는 공공적 측면이 출판물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봅니다. 말씀하신대로 방송을 어느 선까지 풀어야 할지는 논의가 더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말입니다.

    • 이승훈 2008.04.16 21:20

      예. 뭐 지금 당장의 문제로는 "파급력이 큰 방송 프로그램이 미치는 결과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날 수 있다"는 것에 당연히 동의하지요.

      다만 제가 주장하는 것은 앞으로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하는 것. '앞으로는' 방송이 출판처럼 되어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수천억개의 인터넷 방송채널이 공중파방송과 마찬가지의 품질로 Data를 송신할 수 있는 시기가 와야한다는 거지요. 방송채널이 수천억 개 생기게 되면 문제가 달라지지요.

      방송채널이 수천억개 인 그런 상황을 상상하면서 볼 때 네이키드 스시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즉, 저는 네이키드 스시를 비판하기보다는 차라리 방송자원의 희소성과 방송권력의 비대성을 비판하고 싶습니다.

      제 리플의 要는 모든 권력은 분점되어야한다는 공화주의적 신념의 즐거운 공상입니다.

    • 수레바퀴 2008.04.16 21:56

      제가 판단하기로는 우선은 한정된 자원(전파 등)과 채널(시장규모)이라는 현실을 최적으로 편재하는 일이고, 궁극적으로는 방송이라는 것의 역할과 기능을 세그먼트하거나 시장에 맡기는 것도 고려해봄직은 합니다. 다만 당장에 제가 주목하는 것은 방송 종사자, 시청자가 콘텐츠의 공공성을 조율하는 일에 무감각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네이키드 스시의 현실이 방송자원의 희소성과 방송권력의 (일방적) 비대성이라는 측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에도 동의하지만 말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