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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타협없는 개혁

by 수레바퀴 2004. 9. 14.

노무현 정부는 언론과 지식인들에 의해 '좌파'로 지목되고 있다. 그런데 노무현 정부는 이른바 대한민국 헌법의 정체성 즉,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많은 세력들과 타협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손잡고 법을 만들어 가고 있다.


최근 추진 검토중인 '기업도시특별법'을 예로 들면, 기업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기업의 출자제한을 폐지한다. 또 기업이 학교와 병원을 운영하는 것도 허용한다. 반면 정부의 각종 정책과 법률을 검토하는 정부 산하의 각종 위원회에선 노동자 등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은 여전히 소수자의 신세다.


특히 FTA 체결 등 시장 개방을 가속화하면서 세계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한없이 편입되고 있다. 또 국내적으로는 이를 반대하는 노동자의 '파업'을 공권력으로 억압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회에서는 진짜 좌파-민주노동당과는 '경쟁'하고 있다. 이처럼 노무현 정부의 글로벌 시장경제 전략은 이를 또다른 식민지화로 규정하는 좌파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셈이다.


또 국가보안법 폐지, 과거사 청산을 친북세력으로 몰아가는 일부 지식인들이 있다. 조갑제는 盧대통령이 헌정질서를 부정하고 있으므로 현 정권에 대한 '저항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항권'이란 또다른 국헌 문란을 선동하는 일이며, 그것 자체가 국가보안법상의 이적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盧대통령은 이런 '언로'에 대해서 관전할 뿐이다. 자신을 '좌파'라고 몰아부치고, 쫓아내려고 하는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정중하다. 다만 부당하다면 언제나 언론중재위나 관련 법에 의거하는 등 모든 것을 절차에 의존하고 있다. 상식에 따라 처신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일보류나 수구적 지식인들은 '감정'을 자극하고 대통령 탄핵을 거듭 주장하고 있다.


탄핵안을 통과시킨 의회를 끝까지 존중하며, 여론과 선거결과를 중시하는 헌법수호자인 盧대통령과 참여정부를 반체제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 盧대통령의 정치가 알멩이는 없고 대중을 현혹시킨다며 포퓰리즘이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지만, 조중동과 거기에 기생하는 우파 지식인들이 여론시장을 70% 이상 점유하는 사실을 외면한 허위적 독설에 불과하다.


대중 현혹을 위한 선전전에는 대부분의 언론, 그것도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혹자는 KBS, MBC 등 유력한 방송매체가 노무현 정부를 엄호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 역시 기만에 가깝다. 관련 학회에서는 탄핵방송이 편파적이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고, KBS의 정사장은 수시로 국회에서 추궁을 받고 있다. 이렇게 감시자가 많은 언론도 장악된 것인가?


그런데 盧대통령을 비난하는 조중동의 오너들은 공개적이고 능멸적인 공격은 받지 않는다. 지금 노무현과 집권세력은 구기득권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위협 또는 제한하며, 도덕적으로 모욕하고 있기 때문에 DJ 정부 때보다 더 무거운 도전을 받고 있다. 이 도전은 종종 盧대통령과 집권세력을 길들이고 있는데, 여권의 보안법 폐지 유보설도 그때문이다.


그러나 집권세력은 이 비방과 도전으로부터 더 이상 물러나서는 안된다. 참여정부의 시대정신은 종전의 낡고 음습한 패러다임을 바꾸는 일이다. 그것은 첫째, 냉전적인 사유와 구조물-법제도를 혁신하는 일 둘째, 중앙에 집중된 권력과 의욕들을 구체적으로 분산시키는 일 셋째, 역사적 정의를 바로세우는 일이다. 이를 위해선 종전의 패러다임을 등에 업은 세력과의 전면전은 불가피하다.


특히 현재 정치적 갈등은 원만히 해소될 수 없는 주제들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일이므로 애초부터 타협은 어렵다. 전적으로 정치적인 측면의 개혁에서는 피할 수 없는 원칙과 명분이 필요하다. 지지자들은 그러한 전제에 대해 충분히 공감할 것이고, 제3의 관전자들은 지지자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묵시적인 동의를 표할 것이다.


그리고 반대파들의 의견은 개혁이라는 큰 틀에서 흡수시켜야 한다. 더 이상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이다. 타협하고 경청하는 것도 힘의 소진이다. 타협없이 개혁해야 한다. 원래 권위적인 기득권이 반세기 이상 한 국가사회 구성원들의 뼛속 깊이까지 스며든 곳에서는 '개혁'이란 영원히 낯선 언어와 구호가 될 수밖에 없다.


盧대통령은 지난번 의회의 구기득권이 탄핵을 준비하는 데도 간청하지 않았다. 그는 시대를 믿고, 지지자들에게 호소할지언정 타협하지 않았다. 이러한 타협없는 정치는 곧 타협의 여지를 줄여가고 정치를 격렬하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이 정치적 격렬성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경계를 오롯이 드러내면서 더욱 더 가파른 대립의 지점을 탄생시켜왔다.


이 대립을 해소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타협없는 '개혁'-종전의 패러다임으로서는 도저히 도출되지 않는 언어-이다. 언론도, 보안법도, 과거사도, 민족문제도 구시대를 버리지 못하는 세력과 타협하고서는 온전히 구원되지 않는다. 이러한 갈등을 중재하자는 식의 지식인과 언론의 '화해'의 호소가 얼마나 기회주의적이며 위선적인지 깨우쳐야 한다.


물론 노무현式 개혁이 정치적 반대세력과 타협하는 일이 빈번할 수 있다. 정치란 근본적으로 (짧은) 오르가즘으로 내내 사람들을 목매달게 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노무현'의 키워드는 아직까지 그런 허무를 제시하진 않는다. 적어도 盧대통령은 구기득권과의 비타협적 정치를 일관되게 주도하고 있어서이다.


훨씬 더 핵심적 개혁을 지향하는 노무현號는 손상받은 측면을 수선하기보다는 더 거친 풍랑 속으로 나아가고 있다. 무의미한 절충보다는 공세적인 갈등과 마찰이 오히려 개혁의 가치와 범위를 뚜렷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 풍랑 속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 침몰해도, 노무현號는 개혁의 역사에 남는다. 盧대통령은 그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200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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