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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line_journalism

미디어다음 "정보트러스트 운동..."

by 수레바퀴 2004. 8. 24.

"주권재민이라고 하지만 힘없는 사람들 목소리는 사회에 제대로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온라인 상에서는 얘기가 달라지죠. 직업, 학벌, 재력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것이 웹진의 태동 동기입니다."

모뎀을 통해 처음 PC 통신을 연결했을 때 나던 '삐' 소리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볍게 흥분된다는 민명기씨(31). 정보 트러스트 '릴레이 인터뷰' 네 번째로 미디어다음이 만난 사람은 90년대 후반 '더럽지'라는 웹진을 창간한 사이버 논객 1세대 민명기씨다. 그는 대학생 때인 92년 천리안 시사토론 게시판인 '나도 한마디'에 글을 올리면서 왕성한 기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웹진 창간이 활발하던 99년 6월 능동적 사회비판을 모토로 '더럽지'라는 웹진을 창간하기에 이른다.

민씨는 소시민이 제 목소리를 못 내고 정치에 참여하는데 제약을 받는 현실이 "치사하고 더러워서" 웹진 이름을 '더럽지'로 정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인터넷 초기 시절 비해 질 높은 정보공유 활발

- 정보트러스트 갬페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좀 늦은감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보다 IT 분야에서 뒤쳐져있다는 미국에서도 이미 3~4년 전부터 정보보존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행사가 일회적인 행사에 그치지 않고 시민사회 단체나 기업들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현재 우리사회의 정보공유 수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나.
"정보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입니다. 인터넷 초기 시절에 비해 정보 접근이 많이 통제되고 있다고 하지만 초기에 비해 질 높은 정보가 많이 공유되고 있습니다. 단지 개인정보를 기입하는 식의 회원가입 절차를 마련하여 순수한 정보 공유가 아닌 상업적 정보 공유로 변질되는 것이 아쉬울 따름입니다. 정보공유의 유료화 과정도 어쩔 수 없는 수순이라고 봅니다. 좀 더 좋은 정보, 남이 가진 정보를 얻기 위해서 대가를 지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상업적으로 흐른다면 곤란하지만요. "

- 정보공유를 활성화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과거에 기반을 두지 않은 미래란 없습니다. 정보통신부에서는 새로운 디지털 컨텐츠 육성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사이버 박물관 등을 마련하여 정보공유의 창고를 갖추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이버 논객들의 주무대 PC통신 게시판

PC통신에 사이버 논객이 형성되던 시절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90년대 중반 천리안, 하이텔 등에서 내로라 하는 논객들이 큰 게시판에서 사회 현안을 둘러싼 공방을 벌여 화제가 됐습니다. 게시판에서 뜬 스타 논객들에는 김어준(현 딴지일보 대표), 최진순(현 대한매일 뉴미디어국 뉴스팀 팀장), 김동렬씨(인터넷 칼럼니스트) 등이 있습니다. 97년 들어서는 사이버 논객들 사이에서도 의견을 같이하는 사람끼리 모여 김어준파와 최진순파로 나뉘게 됐죠."

이렇게 나뉜 사이버 논객들은 게시판에 올린 글들을 모아 말머리를 달고 그 밑에 글을 다는 형식의 저널형태로 게시판을 꾸려가기 시작했다. 김어준씨쪽은 '딴지일보'를, 최진순씨쪽은 '보태저널'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및 선거 관련 글들을 활발하게 올렸다. 이 밖에 망치일보, 수세미일보, 만두일보 등도 당시 유명했던 저널형태의 게시판이었다.

"기성 언론 비평"에 네티즌 시선 고정

사이버 논객들은 인터넷 인구가 폭발하면서 주무대를 인터넷으로 옮겼다. 98년 딴지 일보의 인터넷 이적을 신호로 웹진 창간 붐이 일었다.

"당시 웹진을 만들어 배너광고를 유치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면서 웹진 창간 붐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더럽지'를 창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통신 게시판에 올린 글이 삭제된다는 데에 있었죠. 공들여 쓴 자식 같은 제 글을 보존하고 싶은 욕구가 웹진 창간으로 이어졌습니다."

99년까지 계속 천리안 게시판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던 민씨는 곧바로 기자모집 공고를 냈다. 서울을 비롯하여 울릉도, 미국 등 각지에서 지원을 했다. 이 중 10여 명이 모여 그 해 6월 드디어 능동적인 사회비판을 모토로 한 '더럽지' 1호가 나오게 된다.


당시 웹진의 역학구도는 딴지일보를 시작으로 망치일보(98년 7월 창간), 정보 민주주의를 외치며 99년 1월 창간한 대자보의 삼파전. 그러나 창간 붐을 타고 웹진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당시 크고 작은 웹진들을 모두 합치면 200여 개에 달했을 정도다.

그는 "당시의 웹진들은 대안언론으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며 "조선일보를 패러디, 각종 사회비리를 과감히 꼬집는 등 기존 언론의 잘못된 관행을 비판하고 언론개혁을 주창했던 진보를 표방한 웹신문이 대부분이었다."고 회고한다.

2000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웹신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낮은 인지도 등으로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영세한 웹진이 사라지면서 뉴스보이나 데일리 클릭, 아이뉴스24 등의 기업화된 거대 웹진만이 생존하는 상황을 맞게 된 것.

민씨는 그러나 "초기 웹진의 시행착오 모델 있었기에 오늘날 웹진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당시 활동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미래 웹진, 화려한 UI 구현가능해질 것

"요즘 웹진들을 보면 너무 상업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아 염려스럽습니다. 기사의 팩트나 정확성은 예전보다 좋아졌지만 경제적 이익 때문에 글을 쓰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이익단체를 대변하거나 특정 업체를 홍보해주는 홍보성 글쓰기 등 기사를 쓰는 의도에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기사가 많습니다."

10년 후 웹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겠냐는 질문에 "10년 후 웹진은 방송국의 형태를 띄고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웹진의 미래에 대해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고 텍스트보다 사진과 그래픽, 음성과 동영상 등의 멀티미디어 서비스를 활발히 구현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장밋빛 전망을 내놓았다.

2003.10.21.

미디어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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