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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그러나 절반의 진실: 조선일보 참여 관찰 연구에 대하여

by 수레바퀴 2025. 4. 20.

윤석민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배진아 공주대 영상학과 교수(이하 연구자)는 조선일보 편집국에 책상을 놓고 출퇴근을 하는 등 총 5개월간 참여 관찰을 수행했다. 언론사의 생산 현장, 특히 국내 보수 성향 언론사를 대표하는 조선일보에서 기자들이 어떻게 뉴스를 구성하고 편집하는지를 직접 목격하고 기록한 것은 귀한 연구 작업이다.

연구자는 “현장에 기반하지 않은 규범 중심의 연구는 이상적 언론인상을 전제한 채, 예외적 ‘지사형 언론인’에 집착하며, 실제 언론 현실을 외면한다. 규범은 추상이고, 해답은 현장이다"며 자신들의 연구에 대한 의의를 밝혔다(<뉴스의 생산>, 498~500쪽). 기존 언론학 연구의 도덕주의적·규범적 성향에 대한 비판이었다.

참여 관찰의 기록은 <저널리즘 연구 1-뉴스의 생산>, <저널리즘 연구 2-뉴스 생산자> 등 총 2권의 책(수록되지 못한 인터뷰 등 실제로는 그 이상의 분량)으로 집대성되었다. 이 책은 ‘현장 기자들의 헌신’과 ‘사실성 추구'의 서사로 가득했다. “편집국의 기자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취지의 진술로 풍성했다.

사투에 가까운 지면 편집 과정들, 데스크와 편집국장의 놀라운 역량들, 소명의식은 선배들보다 잘 보이지 않지만 최선을 다하고 있는 MZ 세대 기자들의 열정이 가득했다. 기자들의 업무 태도와 노력에 감정적으로 몰입하는 면도 보였다. 정치부 사회부 기자들과 동행 취재한 기록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 보도(2025년 3월5일). 저널리즘 연구가 언론 권력을 보호하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것은 연구자가 대체로 연구의 사회적 맥락과 유통 방식을 성찰하지 않을 때 일어난다. 이때 연구는 현장을 진단하는 수단이기보다는 권력을 복제하는 기제로 전락할 수 있다.

전례 없는 관찰, 그러나 공허하다  

연구는 대체로 조선일보의 기자들을 ‘좋은 사람들’로 평가했다. 그래서 관찰자와 관찰 대상 사이에 적정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윤 교수는 "부부가 수십 년 함께 살아도 서로의 성격은 유지되지 않는가. 동화가 아니라 격이 없어지는 과정이다"고 방어했지만 연구자의 정체성이 관찰자보다는 내부자에 더 가까웠다고 여겨진다.

현장을 보는 눈이 구조와 공동체에 미치는 파급 영향을 보지 못하고 감정이입에 그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연구자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현장에서 사실 검증에 매달리며 ‘팩트’를 놓치지 않으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거듭 강조하였다.

기자들이 취재원에게 확인 전화를 반복하는 행위나 데스크와 일선 기자들 그리고 부장 더 나아가 사장의 한 마디까지 ‘사실성의 추구’로 건져올렸다. 연구자들이 강조한 현장이 사실성 추구라는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배경이 된 것 같았다. 

연구자의 공감이 기자의 ‘사실성’에 대한 실증적 검증을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성’은 지극히 협의적이고 기능적인 개념이다. 편집국에서 다투는 ‘사실성’은 항상 ‘선택된 사실’에 가까우며, 이 선택 과정 자체가 정치적이고 편향적일 수 있다. 즉 편집권과 논조의 테두리 안에서 선택되고 배치되는 것으로, 어떤 사실은 강조되고 어떤 사실은 지워진다.

사실 자체보다 ‘어떤 사실을 선택하고 어떤 프레임으로 구성하느냐’가 핵심이다. 특정 팩트를 반복적으로 강조하거나 지면 배치, 기사의 길이, 제목 선택, 후속 보도의 유무 등은 모두 정치적 의도를 내포할 수 있는 편집 행위이다. 기자가 취재한 내용을 데스크에서 어떻게 뽑고, 어떤 워딩으로 포장하고, 어떤 문장을 뺄지 결정하는 것이 곧 논조가 구현되는 과정이다. 참여 관찰이 의미 있으려면 보도 누락 또는 변경 사례, ‘지면에서 지워진 팩트’ 분석 등이 구체적으로 나왔어야 했다.

더욱이 언론사가 사실을 취사선택하는 권력의 작동 프로세스는 비공식적이고 비가시적인 절차를 포함한다. 사실 이런 과정은 관찰 연구자에게 노출되지 않거나, 의도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뉴스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의 진짜 장면은 보도하지 않은 것, 묻힌 것, 논의조차 되지 않은 것에 있다. 

이러한 내밀한 결정의 메커니즘에 맞추지 않고 현장을 설명하는 것은 전체의 절반만 다루는 것에 불과하다. 이 연구는 기자와 경영자 등을 대상으로 인터뷰하며 보완했는데 생생한 이야기는 소수에 불과해서 현장감이 떨어진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저널리즘 퍼스트’를 주창하는 신문이 왜 불신하는 매체 1위에 항상 오르내리는가?  

<미디어오늘> 2025년 4월9일.

‘사실성’, '상식'의 용어가 뭉개는 정파성

연구자는 조선일보 정치부의 기사 생산 및 지면제작 과정에서 편집국장, 데스크의 개입이 두드러진다는 점을 관찰했다. 편집국장이 직접 수정 지시를 내리며, 데스크와 팀장들도 이를 중간에서 수행하는 구조를 확인했다. 그런데 이를 조율 과정으로서 '톱 다운'이 아닌 상호 작용적 협의로 간주하고 "논조가 편집국 전체를 지배하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핵심적인 부분은 언론사가 ‘논조를 가진다’는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논조가 얼마나 자율적이며 다양성을 수용하는가, 그 논조가 저널리즘 원칙에 부합하는가, 논조가 공공의 이익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있다. 누구의 목소리를 배제하며 어떤 권력에 봉사하는가를 짚지 않는다면 언론은 기사만 만드는 공장에 불과하다.

조선일보 편집국의 핵심 부서인 정치부는 수십 년간 보수정당의 논리를 꾸준하게 대변하는 프레임 설정과 어젠다 운영을 반복해왔다. 이런 ‘지속성과 일관성’은 우연이나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적 논조 설계와 가치관 공유의 산물로 볼 수밖에 없다. 

연구자는 이번 연구에 대해 '조선일보 정파성'을 다루는 것이 목표는 아니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편집권의 수직구조를 묘사하되 평가하지 않고, 비판하지 않되 이해하는 것으로 일관했다. 조선일보의 논조가 형성되는 흐름은 '상식'으로 봤다. 

"뉴스 생산자들의 관심을 지배하는 것은 현재 진행형의 구체적 사태들이며 그에 대한 호불호 내지 옳고 그름의 판단은 이념이 아닌 사회 구성원들의 보편적 인식, 즉 상식에 기반한다."(512쪽) 또 "이들은 사실, 상식, 소통에 기반한 뉴스 생산을 통해 어떤 조직보다도 강하고 집요하게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잠재력을 드러냈다"(517쪽)고도 했다. 그런데 언론에서 ‘상식’이라는 용어는 종종 특정 이념이나 경향성을 정당화할 때 쓰인다. 

뉴스 생산과 편집에서 이 '상식'의 권력은 회의실 내부의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절차가 아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도 행사된다. 특정 인물과 사건을 보도 대상으로 선정하는 의제 설정 메커니즘, 검찰 정치권 광고주와의 정보 교환 및 교섭 구조, 보도 유보 또는 보도량 또는 형태 조절에 대한 결정, 기사 누락과 배치의 정치성, 안팎의 취재원과 사석이나 회동에서 나타나는 내밀한 타결 등이다. 또 보도하지 않는 방식, 서로가 선호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연구는 이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사적인 교섭, 경로 의존적인 관행도 비중있게 고찰하지 않았다. 저널리즘 이론에서 논조(stance)와 프레이밍(frame)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조직 문화와 암묵지(暗黙知)의 내면화, 인센티브 구조, 경력 경로 등 제도적이고 문화적인 통제를 통해 작동한다. 명시적으로 지시되지 않아도, 기자들은 편집 방향과 ‘바람직한 톤’을 자기검열(self-censorship)과 경력 관리의 전략 속에서 내면화한다.

그런데 배진아 교수는 “논조에 동의하는 기자가 데스크가 되고, 다시 그 데스크가 비슷한 관점을 가진 기자에게 의존하며, 이것이 반복되는 구조가 조선일보만의 특성이 아니라 전체 신문사의 일반적인 방식”이라고 평가했다. 이러한 흐름이야말로 조직 내부의 정치적 균질화와 자기복제에 다름아니지만 ‘언론 조직의 정상적인 운영 원리’로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또 "윗선 입맛에 맞는 것만 써주자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자기 검열을 하는 것 같다” 등 논조에 순응하는 기류도 있었지만 '일부 젊은 기자들'의 모습으로 한정했다. 연구자는 언론 내 사고 다양성(pluralism)의 부재, 논조 획일화, 편향의 체계화 고착의 여지를 설명할 수 있었지만 넘어간다.

조직문화와 그 관성의 폐해는 기자들이 자사의 정파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더라도 다수에 동조하는 등 침묵에 빠뜨린다는 데 있다. 자신이 소속된 매체의 신뢰도 추락에 대하여 저널리즘 행위를 성찰하지 않는다면 언론은 독자나 공동체에 무슨 책임성이 있는가? 

조선일보 사보(제2682호) 2025년 3월28일. 밀착 현장 취재를 했다는 이 연구에 자주 언급된 설즈버그의 <뉴욕타임스>는 독보적인 저널리즘을 위해 3000명의 기자를 둔다. 조선일보 아니 한국의 신문은 그만한 투자가 왜 일어나지 않는지 질문은 없고 '몸을 갈아넣는 노고'가 현실적으로 전부인양 갈채를 보낸다. 그래서 공허하기만 하다. 기자 생활 25년 동안 대학강단을 오가며 지켜본 결과 국내 언론사 현장에 독보적 저널리즘이 가능한 여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관찰'로는 저널리즘을 구하지 못한다  

조선일보는 한국 보수언론의 대표하는 매체 가운데 하나이고 그동안 중요한 사안이나 시기 때마다 정치적 편향성 문제로 시민사회와 학계의 비판 대상이 되어왔다. 윤석민 교수는 미디어오늘 인터뷰(2023년)에서 “언론의 규범성이 무너졌기 때문에 위기가 왔다. 진영화된 콘텐츠 생산은 독자의 회피를 불러오고, 언론의 위기는 사회 전체의 위기를 증폭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연구자는 이번 연구에서 그동안 조선일보에 제기된 비판을 "현재보다는 과거에 집중하고 전체를 살피기보다는 부분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일화적 내지 인상론적 비평에 가깝고 정치적 의도로부터도 자유롭지 않다"(<뉴스의 생산>, 514~515쪽)고 깎아내렸다.

언론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위기는 저널리즘에 대한 대중의 신뢰의 붕괴다. 이 위기는 기자 개인의 선의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연구는 내부자적 정서를 과도하게 반영하며 기자들의 수고에 집중하였고 마침내 '시시포스적 헌신'이라는 헌사를 남겼다.

이 연구는 조선일보의 문제를 외면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를 문제로 호명하지 않는 방식으로 지나쳤다. 이로써 연구는 언론개혁의 담론에 기여하기보다는, 조선일보라는 특정 언론사의 이미지 세탁으로 먼저 다가왔다. 실제로 조선일보는 이 연구를 인용해 "사실에 사실 쌓아 나온 의견, 어떻게 편향이라 할 수 있나"(2025년 3월25일자)라며 자사 보도에 대한 비판 목소리를 잠재웠다.

학계의 연구가 언론 권력에 의해 어떻게 포장되는지 보여준 사례다. 조선일보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독자들의 비판을 넘어서는 순수한 밑재료를 확보한 셈이다.

연구자는 "언론의 현실과 동떨어진 규범적 가치들을 언론의 본령이라고 인식하고, 언론 위기 극복의 질은 무너져 내린 언론인들의 규범적 아비투스를 복원하는 과제라고 예단했다"(<뉴스 생산자>, 41~42쪽)며 학계의 연구 한계를 지적했다.

참여 관찰은 언론사의 블랙박스를 열기 위한 유효한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관찰의 행위가 곧 진실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일보라는 구조 속에서 어떤 사실이 드러나고, 어떤 사실이 가려졌는지를 더욱 비판적으로 점검할 때만 이뤄질 수 있다.

이번 연구가 수행된 기간은 아니었지만 2024년 12·3 비상계엄 이후 보여준 조선일보의 보도와 논조는 '상식'이었을까?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회(이하 독자권익위)는 지난해 12월부터 이달까지 5개월 연속 갈등 조장, 특정 프레임 강화 등을 지적하며 조선일보 보도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 윤 교수는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 논조와 관련) 구독을 끊지는 않았지만,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 그 정도까지만 이야기하고 싶다”고 에둘러 답했다. 

저널리즘은 기자들의 노력의 총합이 아니라 그 노력이 어떤 권력을 작동시키며, 어떤 담론을 배제하고 강화하는가를 분석해야 하는 사회적 실천이다. 조선일보를 들여다보는 눈이 기자의 노력에만 멈춰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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