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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litics

개혁의 깃발과 길이 보이지 않는다

by 수레바퀴 2004. 11. 19.

누구든지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을 때, 능률적인 신사고와 새로운 창조가 가능해진다. 맑스는 또 "신사고의 장점은 바로 우리들에게 교조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게 하지 않고 오로지 구세계를 비판하는 가운데 신세계를 발현시키기를 희망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한 것처럼 중요한 점은 '비판'의 심산을 잃지 않는 일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통털어 개혁진영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정권의 핵심들에 의해 이미 많은 개혁진영이 권력의 요직에 진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의회는 반세기만에 개혁파가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자만'과 '야욕'이 홍수처럼 불어나고 있다. 이것은 비판적 판단과 공동의 결속을 저해하기 마련이다.

열린우리당이 46석에서 151석의 거대 정당으로서 처음 한 일은 '소모임'을 만들고 '계파간 당권경쟁'을 시작한 일이다. 물론 그것들 외에 개혁입법을 추진하고 나름대로 고민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체계를 창조하여 완성하는 일은 모든 것을 전략적으로 사고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즉자적인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개혁파는 사분오열하고 있다.

지난 시절 386 운동권의 편향과 격렬함이 오히려 그립다. 지금은 사활을 건 싸움의 무대이다. 최대의 포용과 연대를 펴 넓은 시장에 요소요소 파고들지 않으면 앞으로 남은 시간은 더욱 갈등적으로 표출될 것이다. 보수파의 공략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세상을 갈등과 마찰로 조성할 때 중간층은 가파르게 '보수화'하며 진보층은 치열한 사상관으로 조밀하게 갈라진다.

이라크 (추가) 파병이나 국가보안법 폐지와 관련된 개혁파 내부의 '수위조절론'에 따른 상호 견제도 모두 보수파의 바람을 충족시키는 사례들이다. 한 사회의 역사발전은 단계가 있지만, 결코 그 끝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세계는 늘 모순과 운동 속에 놓여 있다. 우리당 내부의 개혁파들이 그같은 변증법적 사유에 따라 치밀한 집권 청사진을 제안하고 있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판단하건대 우리당 개혁파의 사유방식과 실천력에 깊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사회에서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선(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단히 파괴하며 새로운 창안으로 개조될 때 의미있는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그 주도권, 즉, 정치 사회적 의제를 담아내고 소통하는 영향력을 개혁파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듯 뿜어낼 때 '자만'과 '야욕'도 탈피한다.

우리당 내부의 개혁파와 노동계 등 시민사회단체의 간격이 멀어지고 있다. 개혁파가 갖는 위세의 깊이는 얕더라도 반경이 작아져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재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개혁파의 장성함에도 아랑곳않는 보수파의 맹렬하고 일치된, 그리고 신보수파의 추가와 결의가 '개혁' 자체를 무의미하게 끌어내리면서 사회와 개혁파 내부에 '오해'와 '비극'이 싹트고 있다.

현재 우리 모두는 역사의 전환, 과도의 시기에 명백히 들어서 있다. 예전의 규범과 원칙이 부정되는가 하면, 다시금 회귀하는 정체가 반복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라는 '깃발'이 없으며, 실천의 준거가 미약하다는 것이다. 강렬한 위기인식, 오래고 낡은 구조에 대한 좌절과 항거만이 맴도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한국 사회의 짧은 민주주의 헌정사를 되돌아볼 때, 역사와 사회의 개조를 선도하는 정당과 개혁파라면 '자기희생'이야말로 첫번째 덕목이다. 선각자들은 언제나 그렇다. 지금 우리당의 개혁파들은 스스로를 박해하면서 단련되어야 한다. 엄중한 역사의 무대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 나아가야 할 것과 후퇴해야 할 것을 명료하게 확보해야 한다.

그럴때만이 반개혁진영, 즉 보수파의 각종 기량과 은밀한 전략을 파악해낼 수 있다. 루쉰이 지적하듯 "개혁자가 만나는 맞수는 대개 명확한 적대적 계급역량이 아니라 다수의 사회역량과 사회심리"이다. 이것은 실체있는 보수파인, 한나라당과 거대신문들보다 심층적인 층위인 것이다. 보수파들은 군중의 심리를 쉽게 재단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워야 하는 개혁은 그래서 (혁명보다) 힘이 더 드는 것이다.

온전히 개혁의 영도에 들어서려면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한 톨 한 톨 밀알로 기꺼이 스며들 의지를 갖는 위대한 '씨알'들이 모두 불구덩이로 뛰어들만한 실천력이 완비돼야 한다. 그럴때만이 자생할 수 있는 부패와 (권력에의) 집착마저 불태우며, 새로운 사조를 시대에 부담없이 넣을 수 있다.

현재까지는 노대통령만이 외로이 그것을 위해 죽.었.고, 시스템(黨-政-民)은 헛돌고 있다. 한국에서, 개혁은, 배고플 때나 일치되며 감동을 준다는 비아냥을 벗어나야 한다. 충만한 자성과 헌신으로 쌓아온 한국의 개혁사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된다. 지금은 절체절명의 시점이다. 개혁파가 '힘'을 제대로 집중하고 선택해야 한다.

지지자들은 '낭보'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분명한 새 시대를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당 내부를 관통하는 당권경쟁으로 황폐화되는 것은, 새 시대를 여는 이데올로그이다. 자문하고 자각하고 자성해야 한다. 깃발과 길이 보이지 않는 개혁은 뒤따르는 대열의 수도 줄일 뿐이다.

2004.11.19.

출처 : www.dailyseo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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