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이후 우리 사회는 '이념 과잉'과 '이념 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한 사회의 사상적 좌표가 온전하지 못할 때, 백가쟁명식 선동자들과 이데올로기, 기회주의적 관점은 범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단순히 담론 과잉의 차원이 아니라 담론의 허장성세, 곡학아세가 적정선을 넘어서고 있다.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일선(一線)적 세계관은 질풍노도와 진배없는 디지털 네트워크 시대와 크게 엇갈린다는 느낌을 지울 길 없다. 특히 대학교수, 소설가, 언론인 등이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하고 있는 글들을 읽어가고 있노라면, 이것이 과연 '한국 보수주의'인지 되묻고 싶을 정도이다.
이 가운데 연세대 김동길 교수, 고려대 한승조 교수, 이화여대 김용서 교수, 언론인 조갑제 씨 등 대표적인 보수논객들의 망발은 위험수위를 넘어선 지 한참 오래이다. 이들이 노무현 정부 등 신권력집단을 여전히 불용하려는 모럴, 자신감의 배후에는, 뿌리깊은 냉전적 이념구조가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이념구조에 따라 보수논객들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신권력집단을 좌파=반미친북세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한 보수논객은 최근 인터넷으로 공개된 글에서 "탄핵무효운동-총선 국면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대중적 정치운동이 북한의 대남적화전술전략에 따른 것"이며 "방송매체 등이 북한의 책동을 무시함으로써 삽시간에 전국적인 촛불집회와 같은 것이 펼쳐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황당한 논리까지 폈다.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노무현 정부를 '노무현씨의 정권'이라는 해괴한 용어로 비아냥거리는 연세대 김동길 교수는 북한 용천 참사 직후, "자작극일 개연성이 높다."면서 터무니없는 논거들을 펼쳤으나 국제사회가 확인해주는 '사실'들에 대해선 '침묵'하고 있다.
또 월간조선 발행인 조갑제 씨는 최근 확산되는 국내외적 동포돕기 운동이 "북한측에 뇌물을 바치는 정신병적인 상황"으로 매도했고, 이화여대 김용서 교수는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성립된 좌익정권을 타도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복원하는 방법으로는 군부 쿠데타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고 주장해 파문을 불러 일으킨 바 있다.
물론 이러한 보수논객들의 '분석'이 '강연'과 '글'로 개진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는 정당하다. 또 이들의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세력도 존재한다. 문제는 이것이 '한국보수주의'와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그 자체로 운위되고 있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과 현실도 변하고 있다. 이른바 보수논객들이 놓치고 있거나 오독하고 있기에 이들의 시대가 종언하고 있다고 감히 전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보수논객들의 이념구조는 불과 십수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해방정국 이후 조성된 반공이데올로기, 독과점 재벌 및 미디어와 공생하는 권력에 의해 고정불변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동구라파의 몰락, 세계자본주의의 확산, 디지털 네트워크의 성장 등 기존의 세계관을 지탱하던 것으로는 해명되지 않는 거대한 조류가 한반도로 진입하면서 일대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그 결과 북한체제의 변화가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남북간 인적, 물적 교류가 더욱 확대되고 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잇따른 중국방문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동시에 남한의 정치구조도 상당한 수준으로 개혁되고 있다. 4.15 총선은 그 거중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좌파적 정책을 일정하게 수렴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이 헌정사상 처음으로 합법공간인 국회에 진출하고, 사실상 민주화운동의 적통을 잇고 있는 열린우리당이 의회의 과반수를 점유했다.
다시 말해 반공 이데올로기와 독과점 재벌 및 미디어와 공생한 권력기반이 붕괴된 것이다. 총선 이후 한나라당 내 이른바 소장의원들을 중심으로 "엉터리 우(右)인 한나라당이 영남당에 안주하면 연전연패할 것"이라며 수구부패 및 냉전을 상징하는 5공-6공 인사와의 단절과 내부 개혁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의미심장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한미동맹주의'와 같은 냉전체제의 부산물들도 대등하며 합리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한 정치권내의 다양한 시각도 같은 맥락이다.
무엇보다 세계자본주의가 남한은 물론 북한을 더 이상 사각지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북한의 개방을 어떤 형태로든 지금보다는 더욱 획기적으로 유도하면서, 북한 체제를 전향적으로 건설해야하는 근거를 제공할 것이다.
또 시간과 공간을 제약하던 아날로그 '정보'의 폐쇄적-제한적-일방향적 생산·유통구조가, 개방적- 다층적-쌍방향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디지털 정보의 생산·유통구조로 혁신되고 있다. 이것은 감시, 제어되지 않기때문에 독재권력, 또는 시장에 안주하고 고정불변의 이념을 좇는 집단은 자연히 무력해질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간파하고 있는 개인 및 세력에겐 '개혁', '진로 수정' 외엔 미래를 향한 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전지구적인 지식세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지난주 서울에서 개최된 '서울디지털포럼'에서 세계적 전문가들이 '디지털 혁명'을 제언하고 있다. '디지털'은 케케묵은 과거의 관점으로는 수렴되지 못한다. 오로지 미래의 혜안으로 스스로를 혁신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지 않으면 속수무책으로 죽고 만다.
디지털 시대에도 일방향만 보는 수구냉전의 세계관은 전면적으로 개조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한국자유민주주의 그 자체를 죽이는 지뢰가 될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북한과 미국을 둘러싼 제로섬게임이나, 첨예한 이해관계를 베일에 친 진보-보수 논쟁이 아니다. 세계적 조류에 대응할 수 있는 합리적이고 유연한 구조를 만드는 지식세계이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세계가 정치-사회-경제 등 각 분야에 평등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를 달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개혁이 뒤쳐진 분야인 정치권-미디어 기업-재계가 살아남을 수 있는 해답도 자명해진다. 4.15 총선은 그 점을 극적으로 제언하고 있는 분수령인 셈이다.
20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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